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구려-수 전쟁 (문단 편집) === [[평원왕]]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lifeinkorea.com/Sel2636.jpg|width=100%]]}}}|| || '''고구려 왕의 평복'''[* 왕은 상의, 바지, 외투, 머리띠와 흰 비단 모자(백라관), 비단 장식 띠, 금장 버클이 달린 가죽 벨트, 노란 가죽 구두를 했으며, 상의의 소매, 옷단, 목 깃, 끝 부분은 넓은 금 천으로 장식하였다.] || 수나라가 중국 대륙 통일로 모은 내부의 엄청한 힘을 외부로 돌리기 시작한다면 당장 개피를 보는 것은 물론 고구려였다. 고구려는 제25대 [[평원왕]](平原王) 시절부터 수나라에 계속해서 조공을 바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정보 탐색과 돌아가는 모양새도 어느 정도 파악은 했을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581년부터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는데, 584년까지 비교적 짧은 시기 동안 7차에 걸친 조공을 바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던 와중, 마침내 [[진(육조)|남조의 진]]이 수나라에 멸망하여, 기어코 수문제가 중국 통일의 대업을 완수했다는 소식이 고구려에 전해졌다. >三十二年王聞 陳 亡大懼理兵積穀爲拒守之䇿 >32년(590년)에 왕이 진(陳)이 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병기를 수선하고 곡식을 축적하는 것으로 막고 지켜낼 방책을 삼았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삼국사기》권제19 <고구려본기> 제7'''}}} 수나라의 중국 통일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평원왕은 크게 두려워했고, 서둘러 병기를 수선하며 곡식을 모으고, 대처 방법을 생각하는 등 발 빠른 행보를 보였다. 그리고 이 시기 평원왕은 수나라에 지속적으로 사람을 보내 수나라의 무기 장인들을 빼내오기도 하며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수서]]》(隋書)의 기록을 보면, 수 문제 초기에 고구려 사신들이 자주 왔는데, 수나라가 진나라를 평정한 후에는 고구려가 크게 두려워하며 곡식을 저축하고 방어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 점이 당시 수 문제에게 꽤나 거슬리게 보였는지, 수 문제는 [[옥새]]를 찍은 조서인 새서(璽書)를 보내 평원왕을 질책했다. >隋 髙祖 賜王璽書責以雖稱藩附誠節未盡且曰彼之一方雖地狹人少今若黜王不可虚置終湏 更選官屬就彼安撫王若洒心易行率由憲章即是朕之良臣何勞别遣才彦王謂 遼水 之廣何如 長江 髙句麗之人多少 陳 國朕若不存含育責王前愆命一將軍何待多力殷勤曉未許王自新耳王得書惶恐將奉表陳謝而未果 > >수 고조(高祖)가 왕에게 새서(璽書)를 주어 질책하기를 비록 번부(藩附)라고는 하나 정성과 예절을 다하지 않는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그대의 지방이 비록 땅이 좁고 사람이 적다고 할지라도 지금 만약 왕을 쫓아낸다면 비워둘 수 없으므로 마침내 관청의 아전과 하인을 다시 선발하여 그곳에 가서 다스리게 해야 할 것이다. 왕이 만약 마음을 새롭게 하고 행실을 고쳐 법을 따른다면 곧 짐의 좋은 신하이니, 어찌 수고롭게 별도로 재주있는 사람을 보내겠는가?" > >'''"왕이 요수(遼水)의 넓이를 말하나 어찌 장강(長江)만 하겠으며 고구려 인구의 많고 적음이 진(陳)만 하겠는가?'''''[* 한마디로 "'''우리가 장강도 건넜는데 요하를 못 건널 것 같냐?'''" 양자강은 강의 길이가 6300km에 유역 면적은 180만 8500km²이고, 요하(길이 1,345km에 유역 면적 232,000㎢)보다 여섯 배쯤 길고 넓다.][* 좀 깨는 사실은, 남진의 집계 인구는 멸망 당시 50만 호, 고구려는 70년간 전쟁을 하고도 70만 호를 찍어서 더 많았다. 수, 당과의 대전쟁에서 보여준 저력을 봐도 고구려는 남진과는 차원이 다른 상대였으니 명백한 오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게 실제로 고구려 인구>남진 인구를 의미하진 않고 정확히는 '파악된' 호구 숫자가 고구려가 더 많았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국내 관리를 잘한 고구려가 진나라보다 강적이었다는 점은 변하지 않지만... 사실 호구 수가 많단 것은 절대적 인구가 많다기 보단 중앙의 지배력이 지방 곳곳에 미치고 있단 것을 나타낸다. 남조는 귀족세력이 강성하였고 황제권이 약한 국가였기에 수시로 왕조가 바뀌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중앙집권이 매우 잘 돼 있던 국가였으며 이때문에 행정력이 지방 곳곳에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남조는 강남 호족들의 터전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호족 중심의 귀족사회가 형성 되었으며 북래귀족과 토착귀족간의 경쟁도 있었으므로 중앙의 행정력이 지방 방방곳곳에 미치는 것이 힘들었다.] 짐이 만일 포용하고 기르려함이 없고, 이전의 잘못을 질책하려고만 한다면 장군에게 명할 것이지 어찌 많은 힘을 필요로 하겠는가?[* 흥미있는 것은 수나라의 전신인 북주가 불과 몇년 전 고구려에 친정갔다가 회전에서 패배한 전적이 있는데 당시 북주 무제와 수 문제는 사돈 사이였고, 나란히 화북과 중원을 통일한 기세를 몰아 고구려에 싸움을 걸다가 패배한 점도 비슷하다.] 하여 은근히 타이르고 왕이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할 뿐이다. 왕이 글을 받고 황공해서 표(表)를 올려 사과하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삼국사기》권제19 <고구려본기> 제7'''}}} 또한 《수서》에 기록된 [[문제(수)|수문제]]가 [[고구려]]에 보낸 글을 보면 평원왕이 사람을 은밀히 보내 수나라 무기 장인들을 빼돌렸다는 사실이 등장한다. 이를 통해 평원왕이 단순히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수와의 일전을 대비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사실 제16대 [[고국원왕]] 이후 《[[삼국사기]]》의 기록은 중국 측 기록을 그대로 베껴 온 모양새라, 평원왕의 약해보이는 모습도 의도적인 폄하를 그대로 옮겼을 가능성이 크다. >태부(太府)의 공인(工人)은 그 수가 적지 않으니 왕이 반드시 그를 필요로 한다면 스스로 (나에게) 주문(奏聞)하면 될 것인데, '''몇 해 전에는 몰래 와서 재화로써 이익으로 소인(小人)을 움직여 사사로이 궁수(弩手)를 데리고 그대의 나라로 달아났소.''' 병기를 수리하는 의도가 착하지 못하므로 바깥 소문을 두려워하여 도둑질한 것이 아니겠소? > >{{{#!wiki style="text-align: right"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treeId=010201&tabId=01&levelId=hm_013_0040|《수서》 권81, 열전46 <동이열전> -고려-]]'''}}} 또한 [[평원왕]]은 전쟁 준비와 함께 이 당시 쇠퇴 일로를 걷던 고구려를 안정시키는데 큰 노력을 하는 모습이 기록을 통해 보인다. 당시 고구려는 제23대 [[안원왕]](安原王) 이래로 점점 쇠퇴하던 중이었다. 일본 측 기록을 보면 [[내전]]과 [[반란]]도 여러 번 있었고, 특히 제24대 [[양원왕]]은 급부상한 [[신라]]에게 한반도 중부 영토를 거의 다 빼앗겼고[* 교육 과정에서는 이 시기부터 신라의 전성기로 본다.] 심지어 [[북제]] 쪽 기록에서는 양원왕이 북제의 사신에게 주먹으로 얻어맞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그런 말이 나돈다는 자체가 어느 정도 고구려의 위상이나 파워가 예전만 못하다는 식으로는 볼 수 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이면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도 못했을 테니. 이러한 때 고구려 국왕으로 즉위하며, 스스로 검소한 모습을 보였고,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며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고, 무리한 궁궐 수리를 중단하기도 했다. 이렇게 대립의 불씨가 보이는 와중에, [[평원왕]]은 사망하였다. 그 뒤를 이어, 제26대 [[영양왕]](嬰陽王)이 즉위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